산행

구미의 상징 금오산 2016-02-28

몰라! 2016. 2. 29. 23:31

올해는 그동안 구석구석 헤집고 다닌 영남알프스를 조금 벗어나 소백산 이남의 산들을 찾아 다니고자

목표 아닌 목표를 세웠고 그래서 이번 산행은 울산에서 조금 벗어난 구미의 상징 이랄수 있는 금오산으로 친구랑 둘이서 향한다

 

 

 

기암괴석과 계곡이 조화를 이뤄 경관이 뛰어난 산으로 1970년 6월에 한국 최초로 도립공원으로 지정 되었다고 하고

금오산은원래 이름은 대본산(大本山)이었다 이었다. 고려 때는 산세의 아름다움이 중국의 오악(五嶽) 가운데 하나인 숭산(崇山)에 비겨 손색이 없다 하여 남숭산(南崇山)이라 불렀으며, 황해도 해주의 북숭산(北崇山)과 더불어 2대 명산으로 꼽혔다. 금오산명칭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전설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당나라 국사가 빛을 내는 새를 따라 왔더니 이 산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는데, 그 이후로 까마귀가 빛을 띠며 날아왔다고 하여 금오산이 되었다고 한다.

 

 

 

구미 금오산 산행지도

 

 

 

오늘 산행 경로는 관리사무소~대혜문~도선굴~대혜폭포~할딱고개~약사암~금오산정상

~성안~성안전위봉~칼다봉~바위전망대~갈림길~금오산관광호텔~채미정 코스로 약 9.6km 거리로 산행시간 5시간50분(휴식시간 1시간10분 포함)이다

 

 

 

 

 

 

금오산성 대혜문

금오산성은 규모가 매우 큰 축에 속한다. 험한 암석을 밑으로 두른 천혜의 고지대이고, 돌을 쌓아 두른 길이도 내·외성을 합쳐 6.3㎞나 된다.

구미시와 김천시, 칠곡군이 만나 경계를 이루는 현월봉을 중심으로 둘레 4㎞ 정도의 내성을 쌓았다.

 

 

 

해운사는 여느 사찰 못지 않게 고즈넉하고 역사가 깊다.

하지만 유명한 사찰이 있는 경우에는, 등산을 할 때 지불해야하는 문화재관람료가 해운사에는 없다.

해운사는 신라 말기에 도선국사가 창건하였으며, 창건당시에는 대혈사로 불렸다. 대혈사는 1592년 임진왜란 당시에 불타버렸다고 한다.

1925년 중창하면서 해운사로 명칭했다.

 

 

 

대혈은 '큰 구멍'이란 뜻이다. 해운사 뒤편에는 암벽에 뚫려 있는 천연 동굴이 있다. 이 동굴을 대혈굴, 도선굴, 또는 야은굴로 불렸다.

현재는 정식 명칭이 도선굴로 불리고 있다. 도선국사가 대혈굴에서 수행했다는 기록에 근거해서 도선굴로 불린다.

야은 길재 선생이 도선굴에서 은거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그러한 이유로 옛기록에는 야은굴로도 기록되어있다

 

 

 

울산에서 새벽? 여섯시반에 출발 한 관계로 여유롭게 산행 할수 있어 도선굴에 들렀다 간다

 

 

 

도선굴이라는 이름은 신라 말 풍수의 대가인 도선(827∼898) 선사가 이 굴에서 득도(得道)를 한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도선굴로 가는 길

 

 

 

고려 충신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이 도선굴과 대혈사(大穴寺, 도선굴 아래 해운사)에 숨어살며 도학(道學, 성리학) 공부에 전념한 이야기도 유명하다.

그런가 하면 도선굴은 임진왜란 때에는 암벽 틈으로 기어 오르는 칡덩굴을 부여잡고 올라와 사람들이 숨어지냈던 피란처이기도 했다.

대혜폭포에서 절벽 옆을 타고 나 있는 통로는 1937년경 선산군 구미면에서 개통한 것이다.

 

 

 

1592년 4월 13일, 제 1진의 왜장 소서행장이 700여 척의 배에 1만8700명의 장졸들을 거느리고 부산포에 상륙했다.

15일, 첨사 정발(鄭撥)과 부사 송상현(宋象賢)이 장렬히 순국하고 부산은 적의 손에 떨어졌다.

22일, 제대로 된 싸움 한번 없이 대구까지 무너졌고, 적들은 상주를 향해 거의 질주하다시피 북상했다.

 

 

 

이 소식이 김종무에게 전해졌다. (경남 함안) 사근도역에서 찰방으로 근무하고 있던

김종무는 부랴부랴 (경북) 선산으로 올라와 가족들을 금오산 대혈(大穴, 도선굴)에 피신시켰다. 그리고는 단신으로 상주로 달려갔다.

그 날이 4월 23일.
조정에서 내려보낸 순변사 이일(李鎰)은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고 없었다. 진중은 텅 비어 있었다.

김종무는 상주판관 권길(權吉, 1550-1592)과 함께 의병 800명 규합, 결사대를 조직하여 적과 맞섰다.

러나 중과부적에다 낙후된 무기로는 도저히 적들을 이길 수 없었다. 이날 상주 북천변 백사장은 피바다가 되었다.

 

 

 

뒷날 이 처참한 소식을 전해들은 금오산 도선굴의 가족들은 충격을 받았다. 노모와 아내 그리고 맏아들이 마음의 충격을 감당하지 못해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열두 살 된 막내아들만 겨우 살아남아 외조모와 외숙(유성룡의 형 유운룡)이 있는 안동 하회마을로 보내졌다.
어느덧 아이는 자라 스무 살이 되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유년의 한이 맺힌 도선굴 아래에 움집을 짓고 글을 읊으며 은둔하여 살았다.

조정에서 그의 선친 김종무를 기려 아들에게 벼슬을 주었지만 그는 "벼슬 하러 한양으로 가려면 상주땅을 거쳐야 하는데 선고(先考, 돌아가신 아버지)의 시신도 거두지 못한 불효 자식이 어찌 그 길을 밟아 또 다시 불효를 저지를 수 있으리오?" 하며 사양하고는 평생을 가난하게 살았다고 한다    ((Ohmy news 발췌))

 

 

 

도선굴 내부

 

 

 

1937년대에 이길이 뚫렸고 그 전에는 따로 접근 할 길이 없었다고

난간 쇠사슬이 없다면 지금도 쉽게 다니기에는 아슬아슬 할듯~~~ 

 

 

 

대혜폭포는 예로부터 구미 지방 농민들에게 용수 공급의 큰(大) 도움(惠)을 준다고 하여 "대혜(大惠)폭포"라 불려왔다.

이 대혜폭포의 물길은 구미 시내를 가로지르는 금오천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간다

 

 

 

대혜폭포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일찍 출발 하느라 아침도 못 먹은 관계로 여기서 간단하게 에너지 보충

 

 

 

겨울 가뭄 탓인지 수량이 부족해 보인다

 

 

 

할딱고개로 가다 바라 본 도선굴 방향

 

 

 

할딱고개로 올라 가는 계단

오르기 힘들어서 할딱고개라 한다는데 계단이 설치 되어 그런지 그다지 힘들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할딱고개

 

 

 

할딱고개에서 내려다 본 금오지

 

 

 

정상 갔다 하산 해야 할 칼다봉 가는 능선

 

 

 

아름다운 암릉이지만 나의 디카로는 더 이상 선명하게는 안된다

 

 

 

아쉬운 마음에 당겨서 찍어 보지만 역시나~~~

그렇다고 카메라를 좋은 것으로 바꾼다거나 하는 그런 일은 아마 절대로 없을 것 같다 

 

 

 

정상이 가까워지자 울 겨울 울산을 벗어난 산행을 한번도 안해봐서

울산 근교 산 생각하고 출발 전에 아이젠 놔두고 온게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눈이 점점 많아지고

눈이 있어도 올라 가는건 큰 무리가 없지만 내려 가는 길에도 여기 처럼 눈이 많다면 상당히 곤란 한데~~~

하산 길은 해가 들어서 눈이 없을 듯 하다

 

 

 

얼음 폭포

평소에는 물이 거의 없을 듯한 곳이지만 지금은 얼음폭포 

 

 

 

마애석불 지금은 통재된 등산로라 가 볼수 없다

 

 

 

산성이 없어도 산세가 험해서 적군은 쉽게 올라 오지는 못 했을 듯

 

 

 

허물어진 산성의 흔적

 

 

 

상당히 위태로워 보이는 바위

힘껏 한번 밀어나 볼까~~~~ㅎㅎ

 

 

 

정상 바로 아래에 있는 약사암 입구 "동국제일문"

 

 

 

동국제일문을 지나 약사암으로 가 본다

 

 

 

약사암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약사암은 벼랑 끝에 서 있다.

 

 

 

의상대사가 화엄(華嚴)을 공부하고 돌아와

금오산 봉우리 동쪽 바위 밑에 움막을 치고 수도할 때 선녀가 하루 한 끼의 밥을 내려다 주었다고 한다.
이곳에 암자를 지으니 곧 약사암이다. 약사암이란 이름은 모든 중생을 질병에서 구해주다는 약사여래에서 연유한 것이다.

 

 

 

천길 절벽위 아슬아슬한 줄 다리를 건너야 갈 수있는 종각

 

 

 

정상 현월봉은 미군부대 통신시설이 있어 60여년을 정상 바로 아래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2014년 11월 개방되어 지금의 정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금오산 정상에서 한 바퀴를 돌면 경상북도 구미시, 김천시, 성주군, 칠곡군을 내려다 볼 수 있다고 하는데

금오산이 처음인 나로써는 현재 방향 감각도 없고 날씨도 흐려 어디가 어딘지 헷갈린다 

 

 

 

정상 부근에는 바람도 제법 불고 약간의 한기도 느껴지고~~~

인상 디게 안 좋아 보인다~~~ㅋㅎ

 

 

 

오형돌탑

이 탑들은 한 할아버지께서 손주가 10살 즈음에 죽자,

그 손자를 기리기 위해서 돌탑을 쌓았다고 한다. 오형돌탑의 이름도 금오산의 '오'자와 손주 이름에서 '형'자를 따서 붙였다고 한다.

 

 

 

정상에서 보이는 약사암 뒤로 구미시가지가 한눈에 내려다보이고,

오른쪽으로 눈을 돌리면 멀리 팔공산까지 조망이 일품이라고 하는데 오늘은 흐린 날씨 탓에 멀리 보이지 않는다

 

 

 

금오산 정상에서 성안을 거쳐 칼다봉으로 가는 중 허물어진 성벽이 능선을 따라 보인다

 

 

 

성안에서 칼다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은 맑은 날이면 뛰어난 조망과 더불어 걷기에 참 좋을듯 한데 오늘은 흐린 날씨 탓에 조망은 좋지 못하다

 

 

 

칼다봉

이 독특해 보이는 이름 칼다봉 검색을 해 봤지만 명쾌한 해답을 찾지 못했다

 

 

칼다봉에서 내려오다 이정표가 나오면 우틀해서 금오산 관광호텔 방향으로 간다

 

 

 

금오산관광호텔 아래쪽 계곡에서 산행으로 지친 발도 잠시 계곡물에 담그고~~~

아직은 계곡물이 차가워서 오래 있질 못한다 

 

 

 

봄철 산불조심 기간이라 등산로 폐쇄라고 되어 있는 곳이 많다

우리가 내려온 이 길도 봄철 등산로 폐쇄다

 

 

 

채미정 입구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依舊)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 길재, 〈회고가(懷古歌)〉  

 

 

 

오백년을 이어온 고려왕조가 국운이 다해 결국 멸망했다.

많은 인사들이 새롭게 열린 나라 조선의 공신이 되어 개국의 깃발 아래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러나 새로운 나라의 창업에 동참하지 않고 이미 무너져버린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사람들이 있었다.

세상에 다시 나오지 않을 각오로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사람을 비롯하여 두 나라,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고 선언한 이들이다.

멸망한 고려에 충절을 지킨 충신으로 잘 알려진 삼은(三隱)도 이들에 속하는 대표적 인물이다.
길재(吉再)는 바로 그 삼은 중 한 사람이다. 고려 말에서 조선 초기의 학자로 그는 야은(冶隱),

 

 

 

옛 기준으로 보면 절의를 지킨 충신일 수도 있고

요즘 기준으로 해석 하면 변화와 혁신에 뒤떨어 졌다고도 평가 할 수도 잇을 것이라는 생각도 들고~~~~

그 평가와 해석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 질 수 있으리라~~~~

어느 것이 옳은 것인지 틀린 것인지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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